[흑백 요리사] 시즌2가 끝났습니다. 이번 시즌도 지난 시즌만큼 여운이 강렬했습니다. 여러분 만큼 저도 하고 싶은 얘기가 많으니, 더 늦기 전에 한 마디 보태봅니다. 그런데 최강록과 이하성(=요리괴물) 요리사에 대한 얘기는 아닙니다.
을밀대에서 평양 냉면을 처음 먹었던 때를 기억한다. 2006년 7월. '평냉 붐' 같은 게 오기 훨씬 전이었다. 처음엔 본전 생각이 날 정도로 별로였다. 을밀대에 데려간 선배는 결국 좋아하게 될 거라고 말했다. 며칠 더 갔는데 여전히 별로였다. 김밥 천국에서 쫄면이나 먹고 싶었다. 그런데 딱 다섯 번째 갔던 날, 그날은 자다가 새벽에 깼다. 새벽 5시에 을밀대 육수가 떠올라 사라지지 않았다. 배가 고픈 것도 아닌데 그 냉면이 너무 먹고 싶었다. 잠을 설치다가 아침에 을밀대로 달려가 문을 열 때까지 기다려 첫 손님으로 입장했다. 그날 점심 저녁 하루 세 끼 모두 을밀대 냉면을 먹었다.
[흑백 요리사] 시즌2가 끝났다. 지난 시즌만큼 이번 시즌의 마지막 회도 여운이 강렬해서 그런지 많은 사람들이 속속 후기를 남기고 있다. 대체로 시즌2의 최종 경쟁자였던 최강록과 이하성(=요리괴물) 요리사에 대한 비평이 많다.
개인적으론 이하성 요리사가 정말 애쓰면서 살아온 것 같아 짠한 마음이 있다. 더 나아져야 한다, 최고가 되어야 한다, 실패하면 안된다, 경쟁에서 이겨야 한다 같은 태도는 케이팝 아이돌에게서도, 클래식 연주자들에게서도, 혹은 이제 막 졸업을 앞 둔 대학생이나 삼십대 초반의 후배들에게서도 종종 발견하는 태도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그들에게 실패해도 괜찮다는 말을 할 수 없다는 게 짜증나지만 아무튼. 이하성 요리사의 애씀이야말로 한국적인 것, 'K-'의 근원이라는 생각도 든다.
뭐 이런 식으로, 나 또한 [흑백 요리사] 시즌2에 대해선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다. 사실 너무 많아서 문제다. 출연한 요리사들의 창의성 뿐 아니라 그들이 협업하는 방식, 요리를 정의하는 관점, 요리를 대하는 태도, 경쟁자들에 대한 존경심 같은 것들은 우리가 자신의 업을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많은 것을 말해준다. 직장인이든, 프리랜서든, 자영업자든 혹은 취준생이든 지망생이든 HR 담당자든, 임원이든, 초년생이든 모두가 각자의 위치에서 곱씹어 볼 만한 순간들이 넘쳐난다. 그런 점에서 [흑백 요리사] 시즌2의 마지막 회는 '흑백 요리사'라는 콘텐츠 브랜드가 비로소 탄생하는 순간을 보여줬다는 생각도 든다.
마지막 회에서 내가 오랫동안 기억할 것 같은 순간이 있다. 최강록과 이하성 요리사의 마지막 대결? 아니다. 우승자와 탈락자의 소감? 아니다. 그런 클라이막스가 아니라 오히려 마지막 회가 시작되고 1분 쯤 지났을 때, 그러니까 이전 에피소드의 톱 3 대결 결과가 발표되고 후덕죽 요리사가 소감을 말하는 장면이다. 너무 너무 궁금한 메인 디시를 앞둔 에피타이저 같은 순간. 그는 이렇게 말한다.
"맨 처음에 이제 100명 요리사들 출연해서, 아는 제자 후배들도 많고 요리사들의 축제같이… 기분 너무 좋았어요. 서로들 대결하고 승부 걸고 했는데… 가르친 후배들, 제자들도 많이 볼 수 있어서, 이게 한 편으로는 너무 좋구나…"
'축제'라는 단어가 귀에 꽂혔다. 그에게 이 프로그램은 치열한 생존 게임이 아니라 모두가 즐겁게 어우러지는 축제였다. 아니, 상무님... '레전드' 경력자니까 역시 즐길 수 있던 거 아닌가요?? 란 생각이 들었지만. 그런데 그건 다른 요리사들도 마찬가지였을 거다. [흑백요리사]는 검증 프로그램이 아니다. 미쉐린 1스타, 2스타를 받은 요리사들이 각 스테이지에서 탈락한다고 해서 그들의 명예가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흑수저 요리사들 또한 마찬가지다. 오히려 전세계에 그들의 존재를 알릴 수 있는 기회가 된다. 사실 이 프로그램은 섭외와 출연 자체가 명예가 된다는 점에서 희소 가치를 가진다.
이번 시즌에선 유난히 선배와 후배, 스승과 제자가 함께 하는 경우가 많았고, 1:1 경쟁이 끝난 뒤엔 선배 후배 스승 제자가 서로 보듬고 격려하고 애틋한 장면도 많았다. 이런 장면이 등장한다고 해서 경쟁의 긴장감이 사라지지도 않았다. 그게 즐거웠다. '요리하는 즐거움'이 음악처럼 흘렀다. [흑백요리사] 시즌2는 요리 서바이벌인 척 하는 요리 페스티벌이었다.
새삼 제작진을 생각하게 된다. [흑백 요리사] 시즌1의 영향력을 고려하면 시즌2에선 그 이상의 자극적인 무언가가 필요할 것 같았다. 바닥에서 솟아 오르는 식재료나 무한 요리 천국 같은 컨셉은 포장에 불과하다. 서바이벌을 보는 사람들은 출연자들의 경쟁심, 욕망, 고난과 드라마틱한 반전에 열광한다. 그게 서바이벌의 규칙이다. 그런데 [흑백 요리사] 시즌2는 좀 슴슴했다. 특히 인물들을 다룰 때 그랬다. 좀 더 감정적이거나 좀 더 경쟁적으로 캐릭터를 만들어 낼 수 있었지만 무난히 넘어갔다.
최종 심사도 끝나고 최종 우승자의 소감도 끝났을 때, [흑백 요리사] 시즌2는 그동안 출연했던 요리사들의 멘트로 피날레를 장식했다. 하나같이 자신에게 요리가 어떤 의미인지, 왜 요리를 하는지 돌아보는 내용이었다. 요리하는 게 얼마나 즐거운 지에 대한 고백이었다. 요리사에 대한 존경심이 고스란히 전달된다는 점에서, 꽤 인상적이었다. 후덕죽 요리사의 '축제'라는 단어는 바로 그런 인상을 압축한 표현이었다.
축제에는 헤드라이너도 있고 신인도 있다. 헤드라이너는 모객도 하고 페스티벌의 성격도 드러낸다. 그런데 이들을 보려는 사람들만 온다고 축제가 성공하는 건 아니다. 헤드라이너의 슈퍼 팬이든, 아이돌 그룹의 열성 팬이든, 그냥 한 번 놀러 온 사람이든 모두가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면서 어떤 바이브를 만들어야 한다. 그게 기획자들의 몫이라면 무엇보다 참가한 아티스트에 대한 존경심이 있어야 한다.
존경심이란 '다른 사람의 생각과 행동을 존중하고 본받고 싶은 마음과 태도'다. 영어 리스펙트(respect)는 '다시+바라보다(re+spect)'란 맥락에서 존경과 존중을 뜻하는 단어가 되었다. 다시 말해 존경심은 누군가를 오래 들여다 본 사람에게서 자라는 마음이다. 그건 말로 드러나지 않는다. 행동으로 드러난다. 다시 말해 나는 [흑백 요리사] 시즌2의 슴슴한 편집에서 그러한 태도, 제작진이 품고 있는 요리사들에 대한 존경심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런데 편집이란 무엇인가. 바로 만드는 사람(들)의 의도다. 가치관이다. 태도다. 마지막 회를 다 본 다음에 새삼 이 프로그램을 만든 사람들이 요리와 요리사들을 어떤 태도로 대하는지, 뿐만 아니라 서바이벌 예능 프로그램에 대해서 어떤 태도를 갖고 있는지 새삼 느끼고 깨닫게 된다.
이번 시즌은 제작진의 서바이벌 프로그램, 나아가 예능 프로그램에 대한 성찰의 결과 같았다. 모두가 만족한 콘텐츠의 다음 시즌은 어때야 하는가. 그런 콘텐츠를 만드는 사람들은 어때야 하는가. 어떤 의도를 가져야 하고, 그 의도가 어떻게 드러나야 하는가. 출연자들은 어떻게 섭외하고, 그렇게 초대한 사람들과 제작진은 무슨 이야기를 나눠야 하고, 또 나눌 수 있어야 하는가. 마케팅도, 브랜딩도, 영향력도 모두 중요하지만 그 모두를 가능케 하는 핵심 동력은 무엇인가. 지켜야 할 원칙과 하지 말아야 할 원칙은 무슨 기준으로 만들어지는가, 그러한 리더십은 어떻게 훈련되는가... 등등.
여러 질문과 주제가 잠결에도 마구 떠오른다. 을밀대 평양 냉면 같다. 사실 최강록 요리사가 사라지는 엔딩만 갖고도 할 얘기가 너무 많지 않습니까? 굳이 뭘 쓰지는 않더라도, 앞으로 몇 번은 더 돌려보면서 곱씹을 것 같다. 아이 참. 오랜만에 냉면 생각이 간절한 새벽. 역시, 평양 냉면은 겨울에 먹어야 제 맛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