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꽤 오래 전, 12년 전 쯤의 일이다. 한 기획사로부터 케이팝 보이 그룹 연습생을 위한 교양 수업을 맡아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당시 케이팝 산업은 일본과 동남아시아를 넘어 유럽과 미국에 막 진출한 시점이었다. 내게 연락한 곳은 메이저 회사였지만 케이팝 사업은 거의 처음이었다. 생각해보면, 아이돌을 위한 교양 수업이란 것 자체가 흔치 않았다. 회사로서는 케이팝에 대해 미디어가 크게 관심을 기울이면서 생기는 각종 인터뷰에 대응할 필요가 있었고, 또한 멤버들의 교양 수준이 초기 팬들을 모으는데 도움이 될 것이란 가설을 가지고 있었다.
2. 나는 신이 나서 바로 준비해보겠다고 수락했다. 기획사나 보이 그룹의 홍보 때문은 아니었다. 어쨌든 한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아이돌 멤버들도 훈련에만 매진하지 말고, 다양한 교양과 관계를 쌓아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멤버들의 나이는 18~20세였다. 아이돌이든 아니든, 무한 경쟁 상태에 놓인 한국의 10대들에게 교양은 내일을 위한 나침반 같은 거라고 생각했다. 우리는 언젠가 반드시 실패와 좌절을 경험한다. 그 압도적인 감각을 힘껏 껴안든 무리해서 극복하든 어쨌든, 우리는 무너지지 않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어야 한다. 그때 필요한 나침반 하나 쯤 준비하는 걸 도울 수 있다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3. 제일 먼저 함께 읽을 책의 목록을 정리했다. 세계사를 다룬 만화책도 있었고 젊은 시인들의 시집도 있었다. 그 외에 함께 볼 영화나 토론할 주제도 정했다. 스케줄을 고려해서 한 달에 1~2회 정도로 몇 개월 짜리 프로그램을 짜느라 꽤 고생했다. 그런데 여러 이유로 내가 그들을 직접 만나진 못했다. 대신 내부에서 독서 모임을 운영하겠단 얘기를 들었다. 그때 생각이 종종 떠오른다. 그때 그 친구들은 지금 어디서 무얼할까, 부터 2025년의 아이돌에게도 그런 수업(?)이 필요할까...?
4.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케이팝 아티스트에게 '교양'과 '인성'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좀 더 직관적으로 말하면, 기획사든 팬이든 일반 대중이든,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키지 않는 '착한' 아이돌을 바란다.
5. 근데, 착하다는 건 뭘까..?
6. 예전의 나는 아이돌에게는 인문학적 교양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 심도가 얕아도 상관없었다. 가뜩이나 연습할 시간도 없는 10대에게 무얼 바라겠나. 그저 생각하고 말하는 과정을 통해 조금이라도 시민으로서의 태도가 몸에 익히면 좋겠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그런데 지금 이 생각은 살짝 달라졌다.
7. 앞으로의 케이팝 아티스트에게 필요한 건, 리더십이다.
8. 리더십의 관습적 정의는 공동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한 사람이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하여 행동을 유도하는 사회적 과정이다. 다시 말해, "사람들을 이끌어 결과를 창출하는 능력"이라는 게 일반적인 정의다.
9. 리더십은 고대의 신화 속 영웅 서사를 통해 '선택된 자'의 이미지로 개념화되었다. 19세기부터 20세기 초에 리더의 정의는 지능, 카리스마, 용기 등 타고난 자질을 가진 '위인'으로 이해되었다. 19세기 이후 리더십의 개념은 점차 과학적이고 체계적인 연구의 대상이 되었다.
10. 그런데 194~50년대의 리더십 연구는 리더의 타고난 자질이 아니라 구체적 행동(결단력, 화술, 정치력 등)에 초점을 맞췄다. 한편 1960년대 이후에 리더십은 타고난 자질이나 훈련된 기술이 아니라 오히려 주어진 상황(구성원의 특성, 풀어야 할 미션, 외부 환경 등)에 따라 정의된다고 보는 관점이 중요해졌다.
11. 케이팝 뿐 아니라 엔테테인먼트 전반에서 팬덤은 중요해지고 있다. 그런데 팬덤을 공동체/커뮤니티라고 정의한다면 사실상 모든 영역에서 커뮤니티가 지배적인 형태가 될 수 있다. 비즈니스부터 사회 구조까지 크고 작은 커뮤니티가 우리의 정체성에 영향을 미친다.
12. 이런 상황에서 나는 리더십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될 거라고 본다. 케이팝 아티스트에게도 최우선적으로 필요한 건 '인성'이 아니라 '리더십'이다.
13. 케이팝 업계에서 기획사-아티스트-팬덤은 꽤 복잡한 관계를 형성한다. 이러한 복잡성은 '휴먼 리스크'라는 말로 개념화된다. 사업적 관점에서, 잠재적인 리스크를 관리하는 최선의 방법은 가급적 모든 논란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이다. 다시 말해 회사와 아티스트는 끝없이 착해지기 위해 온 힘을 다한다. 이 업계에서 그토록 '인성'이 강조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하지만 모두가 알다시피, 이것은 거의 불가능한 미션이다. 인성이 강조될 수록 인간성은 역설적으로 표백된다. 인간성이란 사실 무언가 모자라고 어긋나 있으면서 앞뒤가 안 맞는 모순적인 성질이기 때문이다.
14. 커뮤니티 시대에 필요한 리더십은 행동사회학적인 관점에서 정의될 수 있다. 한 집단/사회 내에서 개인과 집단의 행동, 상호작용, 규범 형성과 변화를 연구하는 행동사회학에서 리더십은 단순히 명령을 내리는 역할을 넘어, 구성원들의 행동 양식을 형성하고 사회적 규범을 구축하는 데 큰 영향을 미치는 역할이다. 요약하면, 올바른 의사 결정을 위한 리더십이 필요하다.
15. 과거에는 합리적인 의사결정이 중요했다. 여기서 '합리성'은 효율이었다. 하지만 앞으로는 많은 사람들이 얘기하듯 올바른 의사결정, 즉 윤리가 더 중요해질 수 있다. 정보와 지식의 양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날 때 필요한 건 우선 순위를 나누는 가치 판단이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는 더 많은 지식이 아니라 더 많은 지혜가 필요하다.
16. 2년 전인 2023년 2월, 나는 새로운 멤버십을 소개하면서 이런 글을 썼다. 멤버십은 종료되었지만, 이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지혜로움을 분해하면 지식, 통찰, 태도가 나옵니다. 이때 통찰과 태도는 지식과 지혜를 구별하는 기준이 될 수 있습니다. 지식의 방향이 정보의 양을 늘리는 쪽이라면, 지혜의 방향은 핵심과 본질만 남기고 과감히 버리는 쪽입니다.
지식은 과거를 기반으로 현재의 문제에 집중합니다. 정보는 동시대의 변화와 밀접합니다. 반면 지혜는 미래를 준비하게 도와줍니다."
https://maily.so/draft.briefing/posts/e9o0457qr8w
17. 케이팝 팬덤의 지속가능성과 아티스트의 리더십은 분리될 수 없다. 케이팝의 영향력이 커지고 새로운 세대의 팬들이 등장하면 팬과 아티스트의 관계와 기대도 달라지기 때문이다. 아티스트가 능동적으로 팬들과 함께 고민하고 성장하는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해야 팬덤이 유지되고 확장된다. 단지 듣기 좋은 얘기를 하고, 유머를 보여주는 게 아니라 이왕이면 정확하게 커뮤니케이션하고 가능하면 비전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18. 물론, 케이팝 아티스트는 너무 어리다. 팬덤도 어리다. 그래서 기획사의 비전이나 고민이 더욱 요구된다. 무엇보다 인성이 타고나는 것이라면 리더십은 학습으로 훈련될 수 있다. 천성을 바꾸진 못하겠지만, 리더십 훈련은 타고난 천성을 리더십에 활용할 수 있게 도울 수 있다. 다시 말해, 리더십을 제대로 이해하고 재정의하지 못한다면 아티스트 본인 뿐 아니라 케이팝 비즈니스 자체가 성장하지 못할 수 있다.
19. 그리고 무엇보다, 이러한 리더십은 케이팝에만 국한되는 게 아니라, 거의 모든 영역의 거의 모든 사람들에게 필요해질 거라고 본다. 인공지능의 시대가 눈 앞에 펼쳐지고 있기 때문이다. 단순히 인공지능에게 일을 제대로 시키는(=부려 먹는) 문제는 아니다. 상상 이상으로 빨리 성장하는 인공지능과 함께 공존하기 위해 우리는 더욱 똑똑해지는 게 아니라, 더 옳은 결정을 내릴 수 있는 능력을 개발할 수밖에 없다. 그건 윤리와 태도의 문제다.
20. 지금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게 바로 리더십이다.
📖 참고할 만한 자료들
[홀로 성장하는 시대는 끝났다]
- 커뮤니티 리더십에 대한 책. 한국 뿐 아니라 아시아 전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IT 커뮤니티 리더 2,000여 명과 인터뷰하고 교류한 경험을 토대로 집필한 책.
[당신을 초대합니다]
- 영향력은 결과 또는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는 능력이다. 사람들에게 공동체 의식을 심어 주려면 그들이 공동체로부터 영향을 받으면서 동시에 그들도 공동체에 기여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즉, 영향력은 양방향으로 흘러야 한다. (P. 162)
[서번트 리더십: 성장, 권한 부여 및 팀 동기 부여로 가는 길]
- 서번트 리더십은 사고방식이자 삶의 방식입니다. 내가 잘하는 일을 끊임없이 성찰하고, 더 성장할 수 있는 영역을 찾고, 다른 사람들에게 힘을 실어주면서 리더십 효과를 높이고 동기를 부여해 성장하는 팀을 만들 수 있습니다.
📻 under10kpop | のん - 春よ受けて立つ
논(のん) -봄이여 받아주마(春よ受けて立つ) (2025) 제목은 번역기와 여러 링크를 참고로 했습니다. (일본어 뉘앙스 좀 살리고 싶네요.. ㅠㅠ) 발랄한 로큰롤인데 청춘청춘한 비디오 덕분에 특히 더 기분이 좋아집니다.
쇼츠에 떠서 듣게 된 노래인데... 찾아보니 사연이 흥미진진합니다. 근데 또 아는 사람들이 꽤 있을 것 같지만... 이름은 '논'으로 1993년생입니다. 그런데 이름을 바꿨어요. 원래는 '노넨 레나(能年 玲奈)'란 이름으로 2006년부터 모델 겸 배우로 활동했고, 2014년 영화 [핫 로드]로 신인상을 수상했습니다. 2016년 극장판 애니메이션 [이 세계의 한 구석에]에서는 주연 CV로 데뷔했고 2022년엔 영화 [리본]의 각본과 감독을 맡았습니다. 일러스트레이터로도 활동했고요. 다재다능.
그런데 2016년 소속사와 문제가 생겨 법원까지 갔습니다. 그러면서 '노넨 레나'라는 이름으로 아예 활동할 수 없게 되었는데요, 그때를 계기로 2016년에 아예 '논'이란 이름으로 개명해버렸습니다. 그 다음에 바로 잘 풀린 건... 아니고 한동안 일도 없이 슬럼프를 겪다가 버티면서 뚝심으로 하나 씩 잘 풀어낸 케이스라고 하네요. 현재는 '논'이란 주식회사의 대표 겸 '카와이 레이블'의 대표이기도 합니다.
소속사와의 문제는 담당 변호사가 경악할 만큼 비상식적인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2023년 무렵 일본에서 쟈니즈의 여러 악행들이 부각되며 함께 언급되기도 했습니다. 일본 연예계 악습의 피해자라고 할 수 있죠. 그때를 계기로 논은 현재 미국 방식으로 에이전시 계약을 맺고 활동하고 있습니다. 일본에서는 매우 드문 사례라고 하는데, 가능하면 이 부분도 한 번 연구해서 정리해보겠습니다.
※ 숨은 음악을 발견합니다: under10kpop.FM
https://open.spotify.com/embed/playlist/56HJdKSs4RkQM24wK1lZm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