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 드라마 <비밀의 비밀>을 보면서는 전두엽이 바스러지는 기분을 느꼈다. 대충 머리가 아팠다는 뜻이다. 스릴러물이고 새로운 인물들이 매 화마다 세 명씩 추가 됐다. 내가 꼽은 범인 후보군 중에는 범인이 없었다. 완전히 헛다리를 짚었다. 6화까지 멈추지 못하고 보았다. 반대로, TBS 드라마 <콰르텟>은 에피소드 닳는 게 아까워서 하루에 한 편씩 보았다. 이 드라마는 1화가 리트머스지다. 식탁에 둘러 앉은 네 사람이 닭 튀김 요리에 레몬을 뿌릴지 말지를 두고 10분 가까이 대화하는시퀀스의 쓸모를 셈하는 사람과, 그런 식의 대화에 완전히 반해버리는 종류의 사람이 있을 것이다. 나는 후자라서 끝까지 보았던 것 같다.
도무지 어디로 튈지 모르겠으면서도 동시에 땅에 발을 붙이고 있는 현실감 넘치는 인물들을 사랑한다. 혼성 4중주단이 등장하는 <콰르텟>은 '남자 셋 여자 셋' 같은 고전 시트콤과는 다른, 어떤 '남자 둘 여자 둘'을 보여준다. 이 드라마에는 진공상태까지는 아닐지라도 어느정도 독립된, 편의상 아지트라고 부를만한 곳은 한 뼘이나마 각자가 본연의 자기를 지킬 수 있는 물리적 공간인 '벳푸네 별장'이 있다. 어른들의 꿈에 대한 이야기는 아지트가 있어야 시작되는 게 아닐까 싶었다. 결국 모든 건 부동산인가? 그런가하면, 넷플릭스 드라마 <퍼스트 러브: 하츠코이>를 보다가 마는 중이다. 작년에도 보다 말았는데 올 해도 그렇다. 가급적 2024년의 마지막 눈이 오는 날까지 이 드라마를 보고 싶은데, 이렇게 질질 끄는 마음에 대해서는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다. 디즈니+의 다큐 시리즈 <BTS Monuments: Beyond the star>는 글로벌 시장을 대상으로 성공가도를 달리던 방탄소년단이 겪은 팬데믹은 어떤 의미였는지, 힘껏 이루어낸 성취와 재난상황이 함께 맞물리면서 그들이 어떤 생각을 했는지, 그저 짐작에만 그치던 걸 친절하게 알려주는 다큐멘터리였다. 재난은 스타와 팬에게 공평하게 닥쳤다. 우리는 하나하나 70억개의 빛으로 빛나는 '소우주'지만, 동시에 미래가 보이지 않거나 더이상 무엇을 해야하는지 모르는 데에서 오는 두려움과 막막함 앞에서는 장사 없는 존재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 시리즈를 보고나면 더없이 작고 겸손해진다. 멤버 전원이 군 입대를 한 이후에 공개된 콘텐츠다.
이오진 희곡집 《청년부에 미친 혜인이》를 많이 웃으면서 읽었다. 나와 같은 독법의 이름을 가진 '혜인이'가 등장한다. 교회를 오랫동안 다녔으므로 이제와서 새삼 '청년부'라는 곳이 내게 얼마나 중요한 거점이었는지 떠올려봤다. 마음의 고향과는 다르고, 비밀번호를 찾을 때 입력하는 추억의 장소도 아니다. 그곳은 기쁨과 슬픔, 지지부진함과 자극, 환멸과 감탄이 엉켜있는 곳이다. 희곡집에 담긴 대사들이 구체적으로 소환시키는 어떤 순간들이 있었다. 이를테면, 이런 대사를 볼 때.
"전도사 바쁘구나. 다영 예. 전도사 근데 시간은, 또 다영 자매가 하겠다고 마음먹고 구하면 주님께서 만들어주시잖아." -이오진 《청년부에 미친 혜인이》, p.86 MBC <나 혼자 산다>에서 샤이니 키, 그리고 샤이니 'HARD' 퍼포먼스를 담당했던 댄서 카니가 만두를 빚으며 K-막장 드라마를 보는 장면을 보다가, 그대로 SBS 유튜브 채널에 올라 온 <내 남자의 여자> 12부작 요약버전을 보게 됐다. 사실 재작년 연말에 책 <영화를 빨리 감기로 보는 사람들>을 보면서 영화나 드라마의 요약본을 보지 않았던 그때까지의 기조를 앞으로도 조금더 꼿꼿하게 지켜가야 겠다고 다짐 했는데도 봤다.
'김나무'라는 닉네임의 영상 편집자가 포인트를 잘 살리게 드라마를 요약해두어서, 댓글에 영상편집자를 칭찬하는 이들이 많았다. 지난 요약본 다시보기-오늘의 요약본-지난 요약본에 달린 베스트 댓글로 이어지는 구성도 좋았다. 12개의 도넛이 튀겨져서 내 앞에 오면 무조건 12개의 표면 위에 초콜렛 글레이즈드를 해야만 하는, 어떤 길티플레저의 컨베이어밸트 위에서 영원히 내리지 못하는 기분이 들었다. 여전히 내가 <내 남자의 여자>를 봤다고 말해도 좋은지 애매한 구석이있지만, 나는 충분히 내용을 알게 되었다. 동네 마트에 나타난 불륜커플을 처단하고자 일일 교양 강사로 등판한 또렷한딕션의 하유미, 전처인 배종옥 앞에서도 밥, 현여친인 김희애 앞에서도 밥, 그저 밥 타령을 하는 김상중의 열연이 인상적이다. (캐릭터 이름이 아니라 배우 이름으로 써야만 할 것만 같아서 그렇게 쓴다.)
연초에 발표된 곡중에 SF9의 '비보라(BIBORA)'라는 노래가 있다. 비보라라니. 도대체 무슨 뜻일까? 대중가요 노래 제목에 언제나 정보값이 있기를 바라는 건 아니지만, 이는 눈보라에서 '눈(snow)'을 탈락 시키고 그 자리에 '비(rain)'를 넣은 것이다. 그런데 영문 제목이 BIBORA인. 곡 스타일로 말할 것 같으면, 치명 뽕짝의 극치다. 한 달동안 가장 많이 들은 노래일 것이다. 내가 이 곡을 들었을 때의 첫 감상을 적어두었던 걸 트위터에서 그대로 가져와본다. "1-2세대 케이팝 했던 사람들아 진짜 꼭 들어보세요 SF9의 비보라…. 시작은 평범한 딥하우스, 피리 부는 소년 같은 보컬의 저세상 멜로디 "흠뻑 젖어 추억이란 비에 눈물 자국 새겨져" 90년대 st 정직한 랩조금씩 비트가 촘촘해지며 빌드업슬픈데 기쁜 싸비 "눈물은 바다가 되고~" 들으면 눈물 똑. 눈보라에서 파생된 기상 용어 비보라를 곡 제목과 가사에"BIBORA"라고 표기하는 킹받음을 상쇄시키는 건, 군데군데 "삐보라"라는 또렷한 딕션으로 들려오는 케이팝적 추임새… 후반부로 가면 전형적인 2단 고음 클라이막스 후에 또 다시 슬픈데 기뻐지는 멜로디에 속절 없이 무너지는." (2024.1.9에 쓴 트위터)
끝으로, 이번 달부터 구독을 시작한 뉴스레터들을 소개하고, 마친다!
•<교토와 커피와 빵과 책>은 연희동 책방 유어마인드를 운영하는 이로 대표가 오는 2월에 한달간 교토에 머물며 총 30편의 발행을 예고한 뉴스레터다. '교토와 커피', '교토와 빵, '교토와 책'을 제목 삼을 예정이라고. 아직 한 호도 발행되지 않았지만, 지금 구독하면 2월을 위한 작은 기다림이 생기는 거다. 구독하기 •<편협한 이달의 케이팝>의 발행인 일석은 케이팝을 향한 자신의 편협함이 진짜라고 말한다. 때로 온라인에서 마주하는글들의 말미에 붙곤하는 "지극히 주관적인 의견입니다"를 본 적이 있는지? 이 문장을 한 단어로 줄여서 말하자면 '편협'이 될지도 모르겠다. 요즈음의 나는 매일같이 불어나는 케이팝을 식은땀을 흘리면서 따라가고 있는 날들을 보내고 있다. 다 알고 싶다는 욕심 때문이다. 실은 무언가를 좋아하고, 그것에 대해 말하는 마음은 당연히 '편협'할 수 밖에 없는데도 말이다. 아참, 일석의 '고막 조물주'는 켄지라고 한다. 구독하기 •<거북목편지>는 최근 최혜진 《에디토리얼 씽킹》을 출간한, 서점에서 독자들을 만난지는 채 1년이 안 된 출판사 터틀넥프레스에서 발행하는 뉴스레터다. 터틀넥프레스는 1인 출판사이니, 당연히 뉴스레터도 1인 발행 체제일 것이다. (힘내시기를!! 조력자가 없는 저 역시 오늘의 레터 마무리를 길에서 하고 있다.) 거북목편지는 과월호를 제공하지 않는다. 구독 후 나의 받은 편지함에서만 볼 수 있다. 구독하기 |